장을 보러가기로 했다. 요리와는 담을 쌓고 지나는 나와 정반대로 기우는 요리를 잘했다. 심지어 맛있다. 난 불만 켜면 집을 태워먹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이 사람은 불을 가지고 논다. 그래서 난 식탁에 앉아서 그 사람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다. 오늘 장을 보는 이유도 집에 요리할 재료가 뚝 떨어져서다. 저번에 잔뜩 사둔 게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
막상 마음을 먹고 욕실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나오자마자 마주친 기우 덕분에 더 민망해졌다. 수건으로 물기를 짜면서 드라이기를 찾는다. “여기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드라이기를 들고 소파에 앉아있는 네가 보인다. 생각보다 준비성이 철저하다. 못 이기는 척 아래에 앉자 익숙한 손길과 따듯한 바람이 분다. 난 눈을 감고 내가 말할 대사들을 점검...
[이소연 시점] “어.” ‘둘이 한집에 있는 거 확인했습니다.’ “‥목에 흉터는.” ‘확인했습니다. 근데 아직 문양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음 주까지 확정지어.” ‘네.’ “그리고, 확인하면. 바로, 사살해.” ‘같이 있는 남자는 어떡할까요.’ “걔는 건들지 마. 류회장 애니까. 뭐, 눈앞에서 사람이 죽으면 알아서 도망치겠지.” ‘예. 알겠습니다.’ “...
“내일이 졸업식 맞죠?” “네, 맞아요.” “몇 시에 시작해요?” “안 오셨으면 좋겠는데.” 괜히 사람들 눈 뜨는 짓 하고 싶지 않으니까. 안 그래도 안 좋은 소문들이 날 괴롭히는데 졸업식 때 남자가, 그것도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온다면 시선이 한 번에 집중될 건 안 봐도 비디오다. 마지막까지 고슴도치처럼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지 않다. 찔리는 가시...
그 날 이후에 우리에겐 하나의 규칙이 생겼다. 제이가 차려주는 간단한 저녁을 다 먹으면 8시 정도 된다. 그럼 집 청소를 30분정도하고 난 뒤에 정확히 8시 40분에 집을 나선다. 둘이서 같이. 아파트를 빠져나와 나란히 발걸음을 맞춰서 걷는다. 가끔은 아파트 주위만 한 바퀴 돌때도 있고, 날이 춥지 않은 날엔 동네를 한 바퀴 돈다. 우린 걸으면서 얘기를 한...
하루 종일 집에 있으려니까 답답해서 오랜만에 산책을 나가려고 준비를 한다. 아직 밤공기는 많이 시릴 거다. 노란색 목도리를 두르고 현관문을 연다. 그 소리에 제이가 방에서 나와 날 붙잡는다. 빠르다. 아마도 이 사람에게 벗어나려면 정말 조용히 사라져야겠다. 내 자신도 사라진다는 걸 모른 채, 그렇게, 서서히. 제이가 내 손목을 가볍게 붙잡는다. 굳이 그 손...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기다란 햇살 줄기였다. 얇은 커튼 사이로 빛들이 비집고 나왔다. 익숙한 겨울의 추위에 얇은 이불로 온 몸은 감싸고 방문을 열었다. 빵 냄새가 난다. 고소한 냄새를 비집고 시야를 바로 잡으면 보이는 사람이 있다.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욕실로 들어간다. 문이 닫히기 전에 들리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오늘도 커피로 드릴까...
내 기억은 여기까지다. 내가 총을 쏘려고 손가락을 움직인 건 사실이다. 장전도 했고 권총도 멀쩡하고 그리고 지금 나도 멀쩡하다. 사실 이 머리통이 내 머리통이 맞는지 걱정스러워서 흔들어보기도 하고 구멍이 있나 손가락으로 머리를 몇 번이나 쑤셔댔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친 곳은 하나도 없었고 내가 눈 뜬 곳은 내 집이다. 그리고 평온하게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져...
아침에 냉장고를 열어보니 벌써 죽을 다 먹었다. 아무래도 약을 먹느라 꼬박꼬박 챙겨먹은 탓 인거 같다. 문자로 주문을 넣다가 잠시 멈춘다. 아무래도 계속 전복죽을 먹었으니까 호박죽이 땡기는데 먹고 싶은 걸 먹는 게 가장 좋겠지. 그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고 했으니까. 호박죽을 주문하고 나서 얼어붙은 손을 주머니에 넣고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오늘...
찬물로 온 몸에 냉찜질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금 겨울이지, 밖에 눈이 오고. 집이 너무 더운 탓이다. 히터도 좀 작작 틀어야겠다. 겨울에 찬물을 온 몸에다가 끼얹으니 몸 상태도 안 좋은 상태에서 당연히 감기가 들었다. 얼씨구나 하고 날 만신창이로 만든다. 차라리 날 죽여. 가방에 든 권총에 시선이 간다. 저 총으로 누군가를 죽일 날이 온다면 저걸 준 ...
상자를 버릴 수가 없어서 결국 집까지 들고 와버렸다. 노란색이 참 고와서 버리기엔 아깝다. 침대 위에 상자를 두고 노란 리본을 목에 한번 감아본다. 가방에 든 권총을 꺼내서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이걸 왜 나한테 줬을까. 무슨 생각으로, 무슨 생각하면서. 내가 스스로 죽길 원하고 있는 건가. 그럼 소원대로 해주기엔 내가 너무 못돼먹었지. 그래도 노란 상자...
겨울은 자고로 추워야 겨울이다. 발도 달달 떨어보고 고드름이 코에도 맺혀보고 함박눈을 맞아보면서 청승도 떨어보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나는 지금이 겨울인지 여름인지도 잘 모르겠다. 차가운 바람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커다란 창을 손가락으로 건드려보면 내리고 있던 눈들이 전부 나를 처다 보고 있는 것 같다. 감흥 없다. 저 눈들이 나를 보고 웃던지 울던지 ...
세계를 만들기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제가 만들어 낸 인물들을 사랑합니다. 현재 권총을들고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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